오전에 쓰는 일기

일정이 없는 목요일.
어제와 달리 해가 숨었다. 하늘이 뿌옇고 흐리다.

레오씨와 아침을 먹고 그를 배웅한다.
단풍이가 놀아달라고 보채서 평소보다 포옹이 짧다.

신나게 놀더니 응가가 급한가 보다.
책상밑으로 다가와 조용히 아련한 시선을 보낸다.
펜을 내려놓고 단풍이와 집을 나선다.

7시 언저리, 산책하기 딱 좋은 선선함을 느끼며 걷는다.
아파트 화단과 천변에 새들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이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서둘러 이것저것 주워 먹고 있다.

기분 좋게 산책을 하고 돌아오니 비아가 일어나 세수하고 식탁에 앉아있다. 굿모닝 인사를 하고 아침을 차려준다.

본인이 학교에 가기도 전에 수영장 간다고 먼저 나가는 엄마를 이해해 줄 만큼 컸다. 이번에는 비아가 날 배웅한다. 포옹이 길다.

수영장에서 찬물을 가르며 호흡에 집중한다.
어제보다 사람들이 많다. 그들도 같은 생각을 하겠지…
레인을 바꿔가며 물살을 탄다. 넘어지면서 다친 오른쪽 어깨가 팔을 돌릴 때마다 뻐근하고 아프다.

집에 돌아오니 단풍이가 있는 힘껏 반긴다. 평소에 함부로, 쉽게 꼬리를 흔들지 않는 녀석이다.  유일하게 격정적으로 꼬리를 흔들 땐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나는 바로 그 순간뿐이다.

비아가 아침설거지를 하고 등교했다. 용돈이 더 필요한가 보다. 가지런히 엎어진 그릇들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이렇게 컸나 싶다.

종종 비아의 아기 때 사진을 들여다본다. 엄마 말 잘 듣던 귀여운 숙녀는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하고 묻는다.
자글자글한 여드름에 안경을 깊게 눌러쓴 소녀가 대답한다. ‘여기 있지~’

그 시절 엄마와 비아가 어떤 세상에 그대로 머물고 있을
것만 같다고 말하면 ‘엄마는 N이 너무 심해~’하며 웃는다.
엄마도 인정!

우유를 뜨끈하게 데워 거품을 만들고 커피 위에 살포시 얹는다. 시나몬 파우더도 잊지 않는다. 계피향이 가득한 카푸치노가 완성됐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자투리 시간 동안 읽을 책을 가져온다.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

소년이 온다/한강/창비

한강 작가가 유명세를 치르는 동안, 그녀의 책은 도서관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제야 여유롭게 책장을 넘긴다.

첫 장부터 죽음이 드리워진 한국의 역사를 마주한다.
죽음앞에서는 모든 것이 사소로워진다. 일상의 걱정과 고민들이 움츠러든다.

감정선을 깊게 건드리는 한국소설은 의도적으로 읽지 않는 편인데 그날은 나도 모르게 홀린 듯 빌려왔다.

작가의 짧고 단아한 글은 뭉근한 울림이 있다. 작가의 조용하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임무를 마친 세탁기가 보내는 신호음을 끝내 못 들은 척,
애써 만든 카푸치노가 다 식어가는 줄도 모른 채,
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