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끄는 힘, 독서!

인간이 그리는 무늬(최진석)

달빛마리 2021. 6. 14.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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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그리는 무늬/최진석/소나무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인문학이 막 활기를 띄기 시작할 무렵 출판된 꽤 오래된 책이다. 그 쯤해서 미리 읽었다면 인문학의 개념을 정확히 잡고 인문학 도서들을 읽었을 텐데... 오랜 시간 동안 그냥 책만 읽어 내려간 것 같아 많이 아쉬웠다.

책을 읽어보니 교수님의 생각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셨다. 최근의 강연이나 지금까지 쓰신 책들의 궁극적인 알맹이는 이 책에서 주장하는 요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은 '인문의 숲 속을 산책하는 순서'라고 이름 지어진 멋있는 목록을 보여준다. 크게 4가지 숲으로 분류된다.

  1. 첫 번째 인문의 숲 : 인문적 통찰을 통한 독립적 주체되기
  2. 두 번째 인문의 숲 : 인간이 그리는 무늬와 마주 서기
  3. 세 번째 인문의 숲 : 명사에서 벗어나 동사로 존재하라
  4. 네 번째 인문의 숲 :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인문학의 학문적 영역은 철학과 문학 그리고 사학 등이 포함된다고 운을 떼시는 교수님은 결국 인문학의 목적은 인문적 통찰력을 기르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그럼 인문적 통찰의 조건은 무엇일까? 바로 '정치적 판단'과 결별하는 것이다. 정치적 판단은 어떤 현상을 보고 단편적으로 '좋다' 혹은 '나쁘다'라는 식의 이분법적 판단을 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사고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단절시킨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나오는데 역시 모든 학문의 뿌리는 한 점에서 시작되나 보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교수님은 인문적 통찰을 기르면서 개인은 '우리'에서 벗어나 독립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인문적 통찰의 전제는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에서 교수님은 독자에게 물으셨다. '내가 나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이념을 혹시 나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나를 지배하고 있는 지식과 가치를 나로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아폴로 신전 문 상인방에 새겨져 있다는 글귀 Gnothi Seauton! 이 생각났다. 신화 속 테세우스의 운명을 바꾸는 질문이 바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가 아니었던가...

'우리'라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구조로만 존재하는 개념이라는 사실이 신선에게 다가왔다. '우리'가 원하는 가치에 도달하려 노력하다가 '우리'가 원하는 이념에 도달하기 버거워지면 결국 '나'는 열등감이나 불행한 느낌 속으로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오직 '나'에게만 있는 고유한 충동, 힘, 의지, 활동성, 비정형성의 감각 등을 '욕망'이라고 부르는 교수님은 '나'를 '우리'라는 우리에 가두지 말라고 하신다.

다시 독자에게 물으셨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바람직한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바라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여러분은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여러분은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교수님이 인문학은 지식이 아니라 활동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결국 그분이 서양철학 대신 동양 철학을 선택하신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책에서도 서양 사상의 원천은 '사유'지만, 동양 사유의 원천은 구체적 세계에 대한 '경험'이라고 밝히셨기 때문이다.

교수님의 인문학적 관심은 다음의 물음에서 출발했다.
자유에 대한 인문학적 지식은 있는데 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할까?
행복에 대한 인문학적 지식은 있는데 왜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까?
긴 시간 동안 다양한 방면에서 인문학적 지식을 접촉했음에도 그 인문적 지식이 왜 우리 삶에서는 구체화되지 않을까?
왜 나는 행복에 대한 지식만 쌓지 정작 내 자신의 행복한 삶을 꿈꾸고 실천하지 못할까?
왜 나는 자유에 대한 지식만 쌓지 정작 내 자유로운 삶을 생각하지 못할까?
왜 나는 행복과 자유를 창조하지 못할까?

나의 오래된 물음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에 내 삶에서 최진석 교수님을 만난 것은 큰 선물이었다. 강의를 듣고 쓰신 책들을 차례차례 읽으면서 결국 이 책과도 인연이 닿았다.

위에서 언급된 물음은 결국 '주체력'의 부재와 관련이 있다. '주체력'은 덕의 개념이다. '덕'이라는 개념은 중국의 고대 주나라 때 처음 생긴 개념으로 최소한 중국 역사 속에서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최초로 드러낸 계기가 되었다.

결국 '덕'이라는 것은 인간 본래의 마음이다. 오로지 주체, 그 자체일 뿐이다. 지식의 체계도 벗어나고, 가치의 결탁도 끊어 버리고, 이념이나 신념도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어떤 내적인 동력, 오로지 자기가 자기로만 존재하는 '터전', 그 터전에서라야 자기가 독립적 주체로 드러나는 것이다.

덕은 지식을 지혜로 넘겨주는 힘이지요.
경험을 행복과 자유의 영역으로 넘겨주기도 합니다.
게다가 인격적 기품까지 제공하지요.
이 인격적 기품과 지적인 성숙 그리고 인문적 통찰,
이것들은 모두 다 하나의 동력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정말 자기로 존재하는 힘, 바로 덕입니다.

그럼 덕을 쌓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는 힘을 기르는 것, 익숙했던 것을 낯설게 만들어서 마주하는 용기, 예민함을 유지하며 깨어 있기('지금 여기'에 집중하기), 상상력과 창의력을 기르기, 자기 자신과 대면하기

그중에서도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방법으로는 '글쓰기와 운동'이라고 일러주신다. 그 이유가 참 멋지다.

글쓰기를 통해서 자기와 대면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훈고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서늘한 기운을 진 채 새벽 손님처럼 다가오는 '문제'를 손님처럼 대접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일이 상상하는 일이고, 그 문제를 붙잡고 나누었던 상상을 구체적으로 시도하는 것을 우리는 창의성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주인으로 등장하는 것이죠.
자기를 대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좋은 장치는 바로 운동입니다. (중략) 몸을 움직여서 한계를 경험할 때라야, 자기를 극한의 경계선에 서 보게 할 때라야, 자기의 의식 속으로 오히려 자기 자신이 성큼 드러납니다. 자기가 자기를 꽉 채우는 이 경험, 오로지 자기 자신이 자신으로만 남는 일입니다. 자기를 몸으로 느낄 때가 자신에게는 가장 현실적입니다. 운동은 단순히 체력을 기르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대면하는 가장 극적인 장치입니다. p.265-267

그리고 독립적 주체가 되는 방법으로는 글쓰기와 운동에 이어 '낭송'을 하나 더 추가하셨다. 고미숙 선생님의 책 <낭송의 달인>이 스치는 순간이다.

마지막으로 최진석 교수님의 맺음말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욕망을 지키는 자, 덕을 잃지 않은 자는 묵묵히 고행의 길을 감당합니다. 가볍게 풀풀 거리지 않습니다.
관념의 사다리를 애써 치우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비밀스러운 삶의 능선을 조용히 넘으려 합니다.
나를 가벼운 곳에 두지 않습니다.
나를 천한 곳에 있도록 방치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를 보지 않습니다.
나를 호되게 다루지 않고 조심조심 격려하고 사랑하고 보듬어 줍니다.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을 남겨 둡니다.
칙칙하지 않습니다.
밝고 환합니다.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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