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끄는 힘, 독서!

결혼과 도덕(버트런드 러셀 지음/이순희 옮김)

달빛마리 2020. 7. 10.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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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에게 노벨문학상을 선사한 사랑에 대한 고전'이라는 말에 혹해서 그리고 그가 전한 "사랑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인생을 두려워하고 인생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다."라는 멋진 책 표지에 혹해서 읽었다. 

 

버트런드 러셀의 글은 어떤 주제와 상관없이 기독교 비판으로 이어진다.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읽어야 한다. 내가 두 번에 걸쳐 리뷰한 그의 책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읽으면 왜 그의 사상이 모두 한 지점으로 관철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2020/06/03 - [나를 이끄는 힘, 독서] -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버트런드 러셀, 송은경 옮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버트런드 러셀,송은경 옮김)

우선 이 책에 대해서 말을 꺼내기 전에 나는 묵직한 심호흡이 필요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20년 넘도록 가진 나의 신앙을 재점검하는 기회를 우연히 가지게 되었고 그 시점에 두 권의 책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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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7 - [나를 이끄는 힘, 독서] -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2 (버트런드 러셀 지음/송은경 옮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2 (버트런드 러셀 지음/송은경 옮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이 2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고, 지난번 북리뷰에 아쉬움이 남아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Has Religion Made Useful Contributions to Civilisation? (종교는 문명에 공헌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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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런드 러셀은 굉장히 극단적이고 날카로운 철학가지만 결국 그가 쓴 여러 책에서 공통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밝히고자 했던 소중한 가치는 ‘개인의 행복과 자유'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가 개인의 행복을 막아서고 국가가 개인의 행복을 통제하고 잘못된 관념을 가진 결혼 제도가 개인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결국 그는 이 책을 통해 과거에 존재했던 제도들과 여전히 문제점으로 남아있는 제도들이 수정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밝혔고, 결혼이라는 제도에서 빠질 수 없는 '성윤리'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책의 제목이 "Marriage & Morals"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낭만적인 사랑이야말로 인생이 제공하는 가장 강렬한 기쁨의 원천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열정과 상상력, 그리고 배려심을 바치면서 서로를 사랑하는 남녀 관계는 대단히 소중한 것이고, 이를 알지 못하는 것은 대단히 큰 불행이다. 물론 이런 기쁨은 인생의 주요한 목적이 아니라 인생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사회 제도는 마땅히 이런 기쁨을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p.71
결혼은 부부가 반려 관계에서 느끼는 기쁨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결혼은 남편과 아내가 느끼는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서서 아이를 탄생시킨다는 점에서 사회의 긴밀한 구조의 일부분을 형성하는 제도이다. 낭만적인 사랑을 기초로 한 결혼은 바람직할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p.72
자식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식에게 사랑과 의무를 느끼는 남편과 아내는 더 이상은 부부간의 감정을 최고 우위에 둘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p.73
다양한 취미와 희망,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은 배우자도 자신과 비슷하기를 바라기 쉽고,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불만을 느낀다. (중략)
남편과 아내 모두 결혼 생활에 엄청난 행복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그 결혼은 흔히 말하는 행복한 결혼이 될 가능성이 높다. p.123
부부 사이에 자식이 없을 경우에는 부부가 아무리 점잖게 행동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고 해도 이혼이 바람직한 해결책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식이 있을 때는 안정된 결혼 관계가 굉장히 중요하다. p.129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문명사회의 남성과 여성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루는 것은 가능하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려면 수많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부부 쌍방이 완벽히 평등하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서로의 자유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부부 사이에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벽한 친밀감이 형성되어야 하고, 가치의 기준이 어느 정도 일치해야 한다. (가령 한 사람은 금전만을 소중히 여기고, 다른 사람은 선행만을 소중히 여긴다면 그 결혼은 비참해진다.) p.130
성가신 의무들을 일체 무시하고는 결혼 생활이 존립할 수 없다. p.211

이밖에도 버트런드 러셀은 '성을 성행위로 끌어내리는 것이 가장 위험한 실수'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구구절절 맞는 설명을 덧 붙인다.

성행위를 야기하는 성 충동을 만족시키려면, 구애 행위가 있어야 하고, 사랑이 있어야 하고, 친밀한 교류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없이 그저 성행위만 한다면 육체적 갈망은 일시적으로 진정될지 모르지만, 정신적 갈망은 전혀 완화되지 않고 따라서 깊은 만족감을 느낄 수 없다. p.263

다음은 아이 앞에서 다투는 부모들을 향한 그의 날카로운 일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늘 그렇듯 조금은 극단적이지만 뭐 하나 거짓이 없는 내용이다. 모든 부모가 지켜야 할 기본인데 그 기본이 지켜지지 않아 얼마나 많은 문제를 양성하는지 우리 모두는 간접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겪어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식에 대한 부모로서의 의무를 제대로 중시하지 않는다.
양친형 가족이라는 현 제도를 전제로 한다며, 결혼한 부부는 자식이 태어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아무리 엄청난 자제가 필요하다고 할지라도) 필요한 모든 일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인습적인 도덕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부정한 행동을 하고 싶은 욕구를 억제하는 것만이 아니라, 질투와 조급함, 오만함 등의 욕구를 억제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부부간에 벌어지는 심한 말다툼이 원인이 되어 자식들이 신경장애를 앓는 경우가 많으니만큼, 이런 말다툼을 예방하기 위해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부부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자식들이 부모의 불화를 눈치챌 수 없도록 자제를 할 수 없다면 그 부부는 이혼을 하는 편이 낫다.
자식의 입장에서 볼 때, 이혼이 항상 최악의 가능성인 것은 아니다.

부모가 고함을 치고, 격분해서 욕을 퍼붓고, 심지어 폭력까지 휘두르는 모습을 보이는 것 역시 이혼만큼이나 나쁜 것이다. 많은 아이들이 나쁜 가정에서 자라면서 이런 꼴을 보고 들어야 하는 환경 속에 방치되어 있다.
                                                                                                                                  p.278-279

이쯤 되면 우리는 버트런드 러셀이 생각하는 '행복한 결혼'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다행히 그의 책 맺음말에서 이런 궁금증이 딱 풀린다.

행복한 결혼의 정수는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육체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깊이 있는 친밀감을 유지하는 데 있다. 이런 요건들이 충족될 때 남녀 간의 진지한 사랑은 인간의 모든 체험 가운데서 가장 풍요로운 것이 된다. 

이런 사랑은 모든 위대하고 귀중한 것들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의 도덕을 필요로 하며, 더 큰 것을 위해서 작은 것을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런 희생은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희생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사랑의 토대 자체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나는 결혼하기 전에 명확한 개인적인 기준이 있었다. 부부는 종교와 취미는 같되(혹은 서로의 취미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하되) 성품은 상반되어야 불필요한 잡음이 만들어질 때 건강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종교가 다를 경우 한쪽이 희생해야 하는 문제가 반드시 생기기 마련이고, 처음에는 사랑하는 마음에 자발적인 희생이라 여겨져도 시간이 흐를수록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낚시나 게임을 취미로 가진 사람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고 술과 담배에 중독된 사람은 처음부터 나의 가치관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 평생의 반려자로 생각하기 어려웠다.

 

대신 외모를 포기했다. 어려운 결정이었다. (여보 미안, 아주 준수하지만 내 이상형과 거리가 멀다는 뜻)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아이를 바라보면 10년 전 내 결정이 얼마나 지혜로웠는지 정말 다행이다 싶다. 최소한 우리 아이는 부모의 불화나 다툼으로 인한 슬픈 감정을 겪은 일은 없다. 다만 모자란 엄마를 만나 시행착오를 겪으며 매일 함께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부부는 아이의 존재로 인해 원하지 않아도 상대방의 밑바닥까지 들여다 보게 되는 시간을 겪는다. 그 사람의 어린 시절이 보이고, 내면의 상처가 보이고, 부모님의 모습까지 보인다. 동시에 내가 정말 누구인지 사춘기에 스스로에게 물었던 풀리지 않은 질문의 답이 선명해지는 순간이 온다. 거부하고 싶은 순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는 나를 성장시키는 동시에 결국 내 존재의 근원인 부모님을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고마운 존재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 감동인 존재가 바로 부부가 결혼생활을 통해 맺는 결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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