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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2 (버트런드 러셀 지음/송은경 옮김)

달빛마리 2020. 6. 17.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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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이 2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고, 지난번 북리뷰에 아쉬움이 남아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Has Religion Made Useful Contributions to Civilisation? (종교는 문명에 공헌하였는가?)

종교를 두려움에서 생겨난 질병, 인류에게 말할 수 없는 불행을 가져다준 근원이라고 보는 버트런드 러셀도 종교의 2가지 공헌에 대해서는 기꺼이 인정한다고 밝혔다. 그것은 

  1. 역법의 정착에 기여 : 천체운행의 계산으로 산출되는 날짜와 천체의 출몰 시각 등을 정하는 방법
  2. 종교적 목적에서 일식과 월식 현상을 정성껏 기록하던 이집트 사제들이 마침내 그 날짜를 미리 점칠 수 있게 된 배경이 됨

그러나 이 밖의 다른 공로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며 난색을 표한다. 특히나 극단적인 표현으로,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고통은 죄를 씻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좋은 것'이라고 흔히 말하는 데 이것은 자학의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고통받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최선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윤리적 가치에 손상을 입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항상 고통과 불행에 대한 변명거리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왜 더 이상 그의 의견에 부정할 수 없었을까? 

 

아마도 종교의 가장 중요한 근원이 '두려움'이란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그의 주장에 어느 순간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처럼 전쟁, 질병, 실패 등은 모두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만들기 쉽다. 다음은 종교가 호소력을 발휘하는 대상이 공포감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다며 종교가 특히 우리 인간의 자존심에 호소한다고 주장하는 버틀런드의 글이다.

만일 기독교가 진리라면 인류는 보기보다 그렇게 가엾은 벌레들은 아닌 셈이다. 인류는 우주 창조주의 관심의 대상으로서, 행동을 잘하면 창조주가 수고스럽게도 기뻐해 주시고 잘 못하면 불쾌해하시니까 이것은 대단한 우대이다. 우리 같았으면, 개미들 중에 어떤 놈이 자기 의무를 다 하는가 가려내려고 개미집을 연구해 볼 생각은 하지도 못 할 것이다. 그중에 나태한 개미들을 가려내어 모닥불에 던져버릴 생각도 물론 못할 것이다. 만약 신이 우리를 위해 이렇게 해주시는 거라면 우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며 더욱이 우리들 중에 착한 자에게 천국에서의 영원한 행복을 상으로 하사한다는 것은 훨씬 더한 우대이다. 우주의 모든 전개는 소위 선이라는 결과, 다시 말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계획된 것이라고 하는 비교적 현대적인 관념이 있다. 이 관념 역시도 우주는 우리와 취미와 편견을 같이 하는 존재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고 보는 자위적 가정이다.

성서를 접해 본 사람들이라면 위 글에서 버트런드 러셀이 얼마나 그럴듯한 말로 기독교라는 종교를 비꼬았는지 알아채는 것도 모자라 불편함마저 느껴질 것이다.


What I believe (나는 이렇게 믿는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맘 속 깊이 담아두었던 대목이 나온다. 버트런드 러셀은 ‘훌륭한 삶'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훌륭한 삶이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다.

지식과 사랑은 둘 다 무한히 확대되는 성질을 지녔고 사랑과 지식 두 가지 모두 필수적이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사랑이 좀 더 근본적이다라는 것이 그의 주장. 이쯤 되면 그가 정의하는 '사랑'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사랑의 의미를 관조(contemplation)에서 오는 순수한 기쁨과 순수한 자비심이라고 했다. 기쁨과 타인의 행복을 비는 마음, 이 두 가지 요소의 불가분 한 결합이 최고조의 사랑이며 그 적절한 예로는 아름답고 성공한 아이에게서 느끼는 부모의 기쁨 그리고 최고조에 달한 성적 사랑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고 했다. 

남의 행복을 비는 마음이 수반되지 않은 기쁨은 잔인해지기 쉬우며 기쁨이 없이 남의 행복을 비는 태도는 쉽게 식어버리거나 우월감으로 변하기 쉽다는 문장에 얼마나 소름이 끼쳤는지 모르겠다. 

 

이 책에는 버트런드 러셀 외에 다른 사상가의 말도 인용이 되어있는데 잠깐 소개하자면,

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무한 능력에다 완벽한 선과 정의까지 겸비한 조물주의 작품이라고 보기란 불가능하다. (존 스튜어트 밀)
신은 없으나 그래도 우리는 선해야 한다. (조지 엘리엇)

그리고 책 말미에, 1948년 BBC 방송으로도 방영된 적이 있는 버트런드 러셀과 예수회 신부 코플스턴의 토론 내용이 그대로 실렸는데 그 대화가 참 볼 만하다. 코플스턴은 교회 교리를 포함해서 온갖 예제와 유수한 용어로 러셀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려 하지만 러셀은 그런 코플스턴의 말에서 명백한 오류를 찾아낼 뿐이었다. 코플스턴은 러셀에게  '내 틀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거나 무의미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감정적인 표현이라고 지적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러셀이 코플스턴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The times는 러셀만큼 언어를 예리하게 구사하는 사람은 없다며 그는 엉클어진 생각들을 절묘하게 풀어 독자들에게 명쾌한 논리를 선사한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책을 읽고 느낀 바로 그 감정이었다. 무언가 시원하고 통쾌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의 저서 <사람들은 왜 싸우는가>를 읽고 실망한 나머지 이 책을 안 읽었더라면 나는 지금 여전히 안개 낀 숲을 헤매는 그런 기분에 휩싸여 있었을 거다.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 이것을 훌륭한 삶의 정의로 내렸지만 내게는 행복한 삶의 정의다. 버트런드 러셀은 개인의 행복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철학자였다. 훌륭함이라는 것은 타의적인 해석일 수 있지만 자신이 타인을 바라보는 입장이 될 수도 있기에 결국 그가 스스로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 바로 '훌륭한 삶'이 아니었을까 감히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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