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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버트런드 러셀)

달빛마리 2020. 4. 21.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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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트런드 러셀은 1872년 영국 웨일스 출생으로 수학과 철학, 과학, 역사, 교육, 정치학 등의 분야에서 40권 이상의 책을 출간하여 20세기 전 분야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950년에는 영국 왕이 하사하는 메리트 훈장을 받았으며 <<결혼과 도덕>>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책의 원제는 <<사회 재건의 원칙>>으로 버트런드 러셀이 1915-1916년 사이에 1차 대전 당시 이뤄졌던 청년들의 희생, 인류 문명의 파괴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그 강연을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목차를 소개하자면,

1장 성장의 원칙, 충동과 욕구

2장 왜 사람들은 국가에 순종하는가? (국가의 본질)

3장 전쟁은 제도다 (전쟁의 본질)

4장 행복의 조건을 찾다 (소유와 분배)

5장 희망과 두려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교육의 원칙)

6장 여성, 권위에 맞서다 (결혼과 인구 문제)

7장 천 넌 왕국의 붕괴, 그 이후의 세계는? (교회와 종교)

8장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챕터별 목차의 제목이 너무나 매력적이라 기대가 컸던 탓인지 제목과 내용의 일관성이 떨어져 그만큼 실망감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내용이 제목과는 다르게 산으로 들로 가는 바람에 읽으면서 몇 번이나 물음표를 머릿속에 그렸다 :) 번역의 아쉬움인지 원래 그러한 강연의 내용이었는지 조차 사실 파악하기 어려웠다.

 

마치 문제의 해결점을 얘기해 줄 것처럼 이야기를 시작하다가 결국 현실 문제를 비판만 하고 끝나버려 아쉬운 부분도 많았다. 그러나 반복해서 읽으면서 그 와중에 아! 하고 탄식을 불러오는 내용도 있었으니 기대에 미치지 못한 책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개인적인 생각을 덧 붙이지지 않고 최대한 작가의 요지를 실어 보려고 한다.


1장 성장의 원칙, 충동과 욕구

인간의 모든 행동은 충동과 욕구라는 두 가지 원천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욕구가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인간 행동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특정한 목적을 지향하는 욕구 대신에 특정한 행동을 지향하는 충동의 지배를 받는다. 충동은 인간 활동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욕구보다 더 근본적이다.

 

맹목적인 충동은 파멸과 죽음을 낳기도 하지만 세계 최고의 것을 낳기도 한다. 맹목적인 충동은 전쟁의 원천이지만 과학, 예술, 사랑의 원천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충동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충동이 죽음과 퇴보를 향하지 않고 생명과 성장을 향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도덕론자들은 흔히 의지를 통해서 충동을 억제하라고 훈계하지만 이 훈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충동은 완전히 배제된 채 목적과 욕구에 의해서 좌우되는 인생은 지루하다. 하지만 산업주의와 조직은 문명국가의 국민들에게 충동이 아니라 목적에 의거해서 생활하라고 끊임없이 강요한다.

 

2장 왜 사람들은 국가에 순종하는가?

국가의 핵심적인 장점은 인간관계 속에 존재하는 폭력을 법률로 금지하며 개인을 보호하는 것이다. 반면 국가의 핵심적인 결점은 대외적인 무력의 사용을 촉진하고, 민주적인 제도 내에서 개인이 무력감을 느끼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점은 국가가 권력을 주요한 목표로 삼는다는 데 있다.

 

국가의 과도한 권력은 전쟁에 대한 공포심을 부각하고 국민의 자유를 축소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이는 곧 성숙을 저해하는 개인의 무력감을 낳게 된다. 개인적인 무력감의 예방이 작은 도시국가로 회귀하는 것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산업화 이전 시대로 회귀하는 것만큼이나 복고적인 일이다.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은 국가의 역할을 연방 정부 혹은 중재 재재 판소의 역할에 국한시키고,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집단에게 긍정적인 정치적 창의성을 점차적으로 이양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국가의 역할은 이익의 경합을 해결하는 역할로 국한되고, 국가가 적절한 해결책을 찾을 때 의거할 수 있는 유일한 원칙은 모든 관련자들이 일반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3장 전쟁은 제도다

전쟁을 야기하는 근본적인 사실은 경제적인 것이나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인류의 대부분이 화합보다는 충돌을 지향하는 충동을 가지고 있다. 인류의 대부분이 화합보다는 충돌을 지향하는 충동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개인 생활에서 뿐 아니라 국가 간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힘이 충분히 강할  때 자신을 남들로부터 사랑받는 존재보다는 남들이 두려워하는 존재로 부각하려는 활동을 시작한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다툼을 하고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 하는 충동,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충동이 있다.

 

전쟁을 야기하는 것은 신중하게 계산된 사리 추구의 동기가 아니라 바로 이런 충동이다. 평화주의자들이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는 이따금 공동체 전체를 사로잡는 전쟁에 대한 충동을 예방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육과 경제 구조, 그리고 도덕적 원칙의 광범위한 변화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또한 전쟁을 영원히 종식시킬, 유일한 방안은 세계 연방이다. 수많은 주권 국가가 각각 군대를 보유하는 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있을 수 없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세계에 군대가 단 하나뿐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국가의 군사적 기능에 관한 한, 전 세계를 통틀어서 단 하나의 국가만이 존재해야 한다.

 

4장 행복의 조건을 찾다

어떤 경제 체제의 효율성을 검증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은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드느냐 또는 분배적 정의를 보장하느냐가 아니라 사람들의 본능적인 성장을 가로막지 않느냐이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경제 체제는 두 가지 중요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인간의 개인적인 감정을 억누르지 말아야 하고

둘째, 창의적인 충동을 배출할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많이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생산을 증대하려는 열광적인 태도는 인간의 사고를 훨씬 중요한 문제들에서 벗어나게 했다. 근대적인 방법을 이용하면 상당수의 인구는 장시간 노동을 하지 않고도 일용품을 생산할 수 있다. 우리는 더 많은 과학적 지식과 예술, 더 널리 확산된 지식과 정신적 발전, 임금노동자들의 더 많은 여가, 지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할 수 있지만 왜곡된 경제 체제로 인해 이 모두는 사치품을 생산하는 데 투입되고 있다.

 

오늘날의 제도가 야기하는 폐해는 소비자, 생산자, 자본가의 이해관계가 각기 갈리는 데서 비롯한다. 협동조합 제도는 소비자와 자본가의 이해관계를 융합시킨 것이고 생디칼리슴은 생산자와  자본가의 이해관계를 융합시킨 것이다. 이 두 제도는 오늘날의 제도보다는 훨씬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 두 제도를 조합하면 오늘날 존재하는 것과 같은 산업주의의 폐해를 대부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5장 희망과 두려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인간사에서 창의성을 야기하는 원칙은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이다.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모든 것은 유해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막으려는 투쟁이 아니라 유익한 것을 확보하려는 시도에서 비롯한다.

 

현대 교육이 위대한 결과를 낳지 못하는 것은 위대한 희망을 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은 순종과  규율 대신 독립성과 충동을 보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교육은 무자비함 대신 공정한 사고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교육은 경멸 대신 존중심과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을 주입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무조건 묵인해서는 안되고 반대할 때는 풍부한 상상력에 의거해서 이해하려는 태도와 반대하는 이유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동반되어야 한다. 교육은 무조건적인 수용 대신에 건설적인 의문과 지적 탐구심, 진취적인 태도가 승리를 거둔다는 세계관, 사고의 대담성을 조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는 태도, 정치적인 목적에 순종하는 태도는 정신적인 요소에 대한 무관심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앞서 말한 해로운 습성들을 야기하는 직접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이런 원인들 뒤에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교육을 학생들의 성하는 성장을 돕는 수단이 아니라 학생들을 지배하는 권력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태도이다. 여기서 존중심의 결여가 나타난다. 존중심이 강화되어야만 근본적인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다.

 

6장 여성, 권위에 맞서다

지금의 법률과 여론, 경제 체제는 국민의 자질을 퇴화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열등한 절반의 인구가 낳는 자식 수는 다음 세대 인구의 절반을 넘어설 것이다. 또한 여성들은 자유를 요구하고, 낡은 형태의 결혼은 남성과 여성 모두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

 

유럽 국가들이 퇴보하지 않으려면, 그리고 최상의 결혼 관계에만 보장되던 견실한 행복과 근본적인 진지함을 남성과 여서의 관계에서 확보하려면 새로운 제도가 구축되어야 한다. 새로운 제도는 자녀 출산이 공동체에 기여한다는 인식을 토대로 부모들을 과중한 금전적 부담에 노출시키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를 구축하고, 나머지 미흡한 사항들은 개별적인 남성과 여성에게 맡겨 각자의 양심과 신앙심에 따라 행동하도록 두어야 한다.

 

7장 천년왕국의 붕괴, 그 이후의 세계는?

영적인 생활은 인간의 사고와 감정에 대해서 그 리고 다른 것들과 맺은 모든 관계들에 대해서 자유와 깊이와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영적인 생활은 지성과 본능의 균형을 회복시키고, 개별적인 개체가 인류의 생활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 돌아갈 수 있도록 인도한다. 일단 사고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 행복과 평화를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영혼에 의지하는 것뿐이다.

 

신앙심을 잃어버린 것은 영혼이 고갈되어서가 아니라 지성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영감을 얻기 위해서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본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예술과 지성, 각종 정치 문제들을 무시한다. 신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세계를 단념하고 사는 것은 인간의 온당한 본분이 아니다. 이 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계이다. 이 세계를 천국으로 만드느냐 지옥으로 만드느냐를 결정짓는 것은 바로 우리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종교생활은 엄숙한 의식과 미신적인 금지의 종교생활이나 비관적인 또는 금욕적인 종교생활이나 행동규범에 집착하는 종교생활이 아니라 미래의 인간생활에 대한 통찰력에서 영감을 얻는 종교생활, 창의성과 희망이 넘치는 넓고 자유로운 세계에 살면서 창조의 기쁨 때문에 행복한 종교생활이다.

 

바람직한 종교생활은 인류를 사랑하는 종교생활이다. 남의 눈에 비칠 자신의 모습을 위한 인류애가 아니라 상상력을 통해서 파악한 미래 인류의 모습을 앞당기는 인류애여야 한다.

 

마지막 8장,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서 역시 버트런드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사고와 영혼의 뜨거운 불길만이 우리의 지인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삼켜버린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고 모호하게 말한다.


이 책 전체를 아울러서 살펴보면 버트런드 러셀은 인간의 행복을 강요받지 않는 자유와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창의성으로 보고 있다. 책의 제목과 달리 '전쟁'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궁극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행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국가', '교육 제도' 그리고 '종교'의 단점을 극단적으로 드러내어 행복을 가로막는 요소들로 묘사한 부분이 사실 어떤 면에서는 속 시원한 감이 없지 않아 있음을 인정한다.

 

우리의 사고가 다른 범주로 확장됨을 느끼고 싶을 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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