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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이끄는 힘, 독서!

결, 거칢에 대하여 (홍세화)

by 달빛마리 2020.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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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로 유명한 홍세화 작가가 11년 만에 펴낸 책으로 내가 읽기 전에 후배에게 먼저 선물했던 책이었다. 단순히 그를 작가라고 표현하기엔 카테고리가 너무 협소한 느낌이다. '진보 지식인'이라고도 불리는 홍세화 씨는 사회구조를 개혁하고자 하는 마음 만으로도 죄인 취급을 받았던 시대에 펼쳤던 활동으로 어쩔 수 없이 프랑스로 망명, 본인 스스로는 그곳에서 오래도록 망명생활을 했던 난민이라고 표현했다. 한국에서는 서울대 졸업이라는 최고학력을 가진 그였지만 프랑스에서는 생계를 위해 관광가이드와 택시기사를 하며 생활했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신문기자와 소수파 진보정당의 대표를 거쳐 현재는 급기야 장발장 은행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이 책을 소개하기 앞 서, 우리나라 모든 국민들이 필독 도서로 반드시 읽어야 할 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극단적으로 이 책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으로 사람들을 분류하고 싶을 만큼 큰 울림이 있는 양서다. 

 

그는 그의 책 서두에 간디가 꼽는 사회를 병들게 하는 7가지 사회악을 소개한다. 

  • 원칙 없는 정치
  • 노동 없는 부
  • 양심 없는 쾌락
  • 인격 없는 지식
  • 도덕 없는 상업
  • 인간성 없는 과학
  • 헌신 없는 신앙

그의 책은 사회 비평 에세이로 분류되며 4가지 카테고리로 생각을 전한다. 사실 책 소개를 하기 전에 고민이 있었다. 한 글자도 빠짐없이 그대로 전달되어야 할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그의 생각들 중에서 내가 고집하는 가치만 실는다는 것 자체가 작가의 글에 누를 끼치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제1부 자유, 자유인

신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지만, 단 한 사람의 탐욕도 만족시킬 수 없다. (간디)
적극적 자유는 '내 삶과 나의 결정이 외부의 그 어떤 힘이 아닌 오로지 나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뜻하며 '나는 나의 합리성이 나의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을 질 수 있을 때 자유로운 반면, 내 결정이 나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할 때, 그것은 굴종'이다. (이사야 벌린)

자유는 고결함을 지향한다. 자유인이 '회의하는 자아'로서 지향하는 고결함은 제로섬 게임이 적용되는 고귀함과 다르다. 고귀함은 '귀함'이 뜻하듯 태생적으로 선택된 사람이거나 남과 경쟁하여 승리한 자의 몫이다. 고귀함은 그 반대편에 비천함을 필요로 하지만, 고결함은 그렇지 않다. 나의 고결함이 너의 비루함을 전제하지 않는다. 고결함은 남과 경쟁하여 승리한 자의 몫이 아니라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의 산물이며 선물이다. 나의 고결함이 너의 고결함을 가로막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고결함으로 이끈다. 설령 결이 다르다고 해도 서로가 서로의 곱고 섬세한 결을 느끼며 향유할 수 있다. 

 

'스스로 족함을 아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은 가난할지라도 구성원 모두가 자유로운 곳 (이반 일리치)

 

우리는 '가난하면서도 즐겁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다. 가난하면 즐거울 수 없고 부유하면 예를 좋아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오늘 나를 고결하게 짓는 자유의 길은 과거보다 더 절차탁마를 요구하고 있다. 

 

'사단칠정'의 '사단' 즉 맹자에 따르면 인간의 조건이며, 퇴계(이황)나 고봉(기대승) 선생에 따르면 인간에게 선함을 발현케 하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출세하려면 멀리해야 하는 가치가 되었다. 

 

인문학의 중요성은 다른 무엇보다 이 자유에의 의지를 되찾고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데 있다. 물질적 욕망을 부추겨온 주류 이데올로기에 순응하여 부귀영화를 좇았던 삶의 덧없음을 불현듯 느끼고 고결한 삶의 길을 찾도록 눈빛을 형형하게 해주는 것 또한 인간의 자유에의 의지에서 비롯된다. 

 

<자유>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자유여.

(프랑스의 시인 폴 엘뤼아르)

 

과정 자체가 그 싸움을 통해 획득하고자 하는 사회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 (나오미 울프)

무엇보다 배움터인 각급 학교에서 시민교육과 노동인권 교육을 강화해야 하는 것은 미룰 수 없는 과제다. 배움터에서는 학생들을 무한 경쟁에 시달리게 하는 것을, 일터에서는 갑질을 당하고 자신보다 약한 병이나 정에게 을질을 하는 것을, 집에서는 일터의 울분을 가족에게 푸는 것을 멈춰야 한다. 

 

폭력은 "남이 당신에게 행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당신 또한 남에게 행하지 말라" "남이 당신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당신도 남에게 해주어라"라는 황금률을 어긴 행위다. 이 황금률을 지켜야 한다. 그 출발점은 몸의 자유를 존중하는 데 있다.


제2부  회의하는 자아

얻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 머릿속이 차라리 비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생각한다(=나는 회의한다)"가 없는 채 지배 세력이 선별한 생각(=고집)을 정답으로 주입받았기 때문에,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고 있음에도 회의할 줄 모르고 그것을 막무가내로 고집하는, 완성된 존재처럼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한국의 대다수 피지배 대중이 보여주고 있는 서글픈 자화상이다. 

사람은 현존재를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스피노자)

사람에게 배고픔의 현상은 있어도 '생각 고픔'의 현상은 없다.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과 충돌하는 생각이 바깥에서 다가올라치면 가차 없이 배척한다. 생각의 성질이 머물기, 즉 고집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중략) 틀린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보충하는 일을 습관화하기! 이것은 바로 회의하는 자아의 일상이다! 

 

"독서는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글쓰기는 사람을 정교하게 한다."는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참 명제인데, 대학 서열 체제는 교사와 학생에게 독서와 글쓰기에서 멀어지도록 강제해왔다. 전체주의 학습 방식인 주입식 암기 교육이라는 역사적 족쇄와 대학 서열 체제라는 제도적 족쇄가 결합하여 "나는 생각한다"를 학교와 교실에서 몰아낸 것이다.

올바른 교육이라면 

  1. 그 교과목을 학습해야 하는 목표
  2.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학습 과정
  3. 그 과정을 통해 목적에 얼마나 다가갔는지에 대한 평가

이 세 부분에서 통일성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은 줄을 세우는 평가를 위해 목적을 왜곡시켰다.

 

제3부 존재와 의식 사이의 함정들

子曰: 
학이불사즉망 (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 思而不學則殆)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나는 생각한다"가 없는 사람들은 회의할 줄 모르며 생각의 문을 열지 않는다. 회의하는 사람이어야 설득이든 계몽이든 가능하다. 가령 17세기 유럽에서 회의론으로 출발한 근대철학이 다름 세기인 18세기에 '빛의 세기' '계몽 세기'로 꽃 피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사람들이 회의했기 때문에 생각의 문을 열었고 그래서 설득이 가능했다는 점에 있었다.

'개똥 세 개의 가르침'에서 나 자신의 모습인데도 남인 양 계속 타자화하고 업신여길 뿐만 아니라, 나의 사유 세계 바깥에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도 인식하지 못한 채 오늘을 살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보다 두려운 일이 또 있을까! 

 

프랑스 쉬드(S.U.D. : 연대-단결-민주) 노조에서 일하는 여성 활동가가 이렇게 물었다. 

"한국의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삼성 제품을 보이콧하지 않나요?" 

노동자를 무시하고 노동조합을 부정하는 부정하는 재벌 기업을 용인한다는 것은 노동조합원에게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다. 이 간단한 이치가 한국에서는 유별난 일에 속한다. 황상기 씨가 "삼성에 노조가 있었다면 내 딸 유미는 죽지 않았을 겁니다"라고 말했을 때,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2016년 구의역 김 군이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열차에 치여 숨진 뒤 공채로 서울교통공사에 입사한 무기직 노동자를 기존 정규직 노동자들이 사내 게시판에서 '무기충'이라 부르고 "구걸해서 들어오니까 좋으냐" "지하철역에서 노숙자가 많은데 그 사람들도 떼쓰면 다 정규직 해주는 거냐"라고 비아냥대는 데 이르렀다. 

 

머리(의식)도 중요하지만, 머리보다 가슴(공감 능력)이 더 중요하고, 가슴보다는 발(실천)이 더 중요하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나를 성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가난을 만드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말하자, 사람들은 나를 빨갱이라고 불렀다." (고 동 에우데르 카마라 대주교)

제4부 난민, 은행장 되다

장발장 은행은 2015년 2월 25일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법을 위반한 행위를 저질러 국가로부터 벌금형을 받은 사람들 중에 벌금을 낼 형편이 못 돼 교도소에 갇혀 강제노역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벌금액을 빌려주는 은행이다. 이자도 없고 담보도 없고 신용 조회도 하지 않는다. 한국의 벌금형 제도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벌금형을 받는 수형자가 벌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서 강제 노역을 할 경우, 2014년까지는 대개 하루에 5만 원씩 차감되었는데 (판사 재량) 대주그룹 허재호 회장에게는 교도소 노역 하루당 벌금을 5억 원씩 깎아주어 5일 동안 25억 원의 벌금액을 감탕 받은 사건이 알려진 후 하루 10만 원으로 두배가 되었다. 

 

장발장 은행의 주체는 이 은행의 취지에 동참하여 연대하는 시민들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에 들어가 강제노역을 하는 사람이 1년에 5만 명 가까이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놀라웠다. 징역형은 벌금형보다 무거운 형벌인데 징역형에는 집행유예 제도가 있어서 재벌 총수나 비리 정치인, 고위 공무원은 교도소에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벌금형에는 집행유예 제도가 없기 때문에 돈이 없으면 꼼짝없이 감옥에 가야 한다는 것도 전에는 몰랐던 사실이었다. 

 

유럽은 재산과 소득에 따라 차등을 두어 부과하는 '일수 벌금제'를 시행하는데 한국은 총액 벌금제를 시행한다. 예를 들어 100만원의 벌금이 기업가와 차상위계층에게 과연 같은 가치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이미 불평등을 겪는 일인데, 징벌에서 또다시 불평등을 겪게 하는 법 제도를 왜 아직도 고치지 않고 있는 걸까? 결국 장발장 은행의 노력으로 실제로 2015년 벌금제 개혁 법안은 본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통과되었다.

  1. 벌금형에도 집행유예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동안 집행유예는 징역 3년 이하에만 가능했지만, 형법 개정을 통해 벌금 500만 원 이하에 대해서도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있게 되었다. 
  2. 벌금을 현금만이 아닌 신용카드나 체크카드로도 낼 수 있게 되었다.
  3. 분할 납부와 납부 연기도 법률에 근거를 두게 되었다. 벌금을 나눠 내거나, 급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나중에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작가는 2년 유예기간을 거쳐 법이 시행되고 있지만 판사들이 새 법을 적극적으로 적용하지 않은 탓인지 대출 신청자가 눈에 띄게 줄고 있지는 않다고 말하면서 장발장 은행이 되도록 빨리 문을 닫고자 일수 벌금제와 사회봉사명령제 도입을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나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더불어 스스로의 철학, 가치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홍세화 작가는 신념의 뿌리가 단단한 분이다. 본인의 철학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고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실천하는 분이다. 우리 사회를 언론이 보여주고 싶은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고 그 이면의 진실을 간파하고 있는 분이다. 위에서 밝힌 '개똥 세 개의 철학'은 일부러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 이 책의 핵심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한 그 내용을, 사람들이 직접 책을 읽음으로써 알았으면 하는 것이 내가 바라는 바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을 그의 글로 마무리해본다.

불안은 인간의 영혼을 잠식한
불안 때문에 각자가 나를 어떤 존재로 지을 것인가의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소박하게 살지언정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는 사회, 더불어 사는 사회로 가야 한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연대의 정신과 성숙한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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