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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20세기의 봄(조선희)

달빛마리 2021. 1. 1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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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조선희/한겨례출판

 

오랜만에 한국 장편소설을 읽었다. 책을 읽고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아 이것저것  검색해보니 2017년에 첫 출판되어 경향신문이 선정한 올해의 책 그리고 제9회 허균 문학 작가상과 제34회 요산 김정한 문학상까지 수상한 역시 알아주는 걸출한 작품이었다. 최근에는 어나더 커버 특별판으로 양장 합본으로도 구할 수 있다. 

 

책의 에필로그에서 전해지는 작가의 말에서 뜨겁고 묵직함이 느껴진다.

" 소설을 쓰는 동안 한 시대를 탐사하느라 즐거웠지만 비통한 일들에 많이 울었다.
그분들의 삶을, 그분들 세대의 삶을, 그 시대의 역사를 위로하며 보내드린다."

p.377, 세 여자 2 에필로그 중에서

이 소설은 낡은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되었다. 1990년 당시 소련의 모이세예프 무용학교 교수인 비비안나 박이 서울에 왔을 때 가져온 여러 사진 중 하나였다. 사진의 세 여인은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했던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의 실존 인물들이었다. 

 

작가는 그중에서도 특히 '허정숙'에 흥미를 가지고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2005년에 소설을 시작했으나 두 번의 공직생활로 무려 12년 만에 <세 여자>는 완성이 됐다. 

 

소설에 등장한 모든 사람들은 실존 인물이고(삼월이 제외) 정확하게 표기된 날짜들 역시 모두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인 기록이다. 책을 읽는 내내 작가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얼마나 방대한 연구를 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학교 다닐 때 배웠던 역사와는 확연히 다른 관점으로 쓰인 소설이라 낯설기는 했다. 더욱이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을 가진 여성 혁명가들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는 이 소설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김구나 이승만이 역사속에서 얼마나 미화되었는지 그 사이 여운형과 허헌 같은 사람들은 또 얼마나 쉽게 잊혀졌는지도 알 수 있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면 사진 속 세 여자는 모두 짧은 단발을 하고 있다. 쪽진 머리를 풀어 단발로 자르는 것은 '난 독립된 인격체요'라는 1인 시위였기 때문에 그 당시 굉장한 핫이슈였다고 한다. 

 

그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 속에서 오롯이 자신이 믿는 사상과 신념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여성 혁명 운동가들이었다.

" 재산도 버렸고 애인과 가족도 버렸고 더 버릴 것이 없을 때는 목숨을 버렸다."

p. 370-371 에필로그, 세 여자 2

정숙은 세상의 모든 언어로 말하고 싶었고 이 세상 모든 항구에 정박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모든 것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장 맹수 이빨 사이에 끼어 있는 조선민족을 구할 사상과 이론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했다.

p.21, 세여자 1

주세죽은 신념과 종교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종교마저 포기했다.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박헌영의 말이 꽤나 그럴듯했다. 

"우치무라 간조는 러일전쟁 반대하고 한일합방 비판한 사람이오. 아주 훌륭하고 모범적인 기독교인지요. 일본에도 이런 양심적인 인사가 있소. 그런데 이 양반은 무교회주의자요. 하느님이 교회 안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지요. 일요일마다 목사 설교 들으러 가는 것보다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게 더 중요하다 했어요."
p. 49 , 세여자 1

추위와 배고픔으로 인해 고통받고 감옥에 투옥돼 고문까지 당하면서도 쉽게 버리지 못했던 그들의 신념은 과연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만주와 동경으로, 블라디보스크에서 상해로, 베이징을 거쳐 모스크바와 카자흐스탄으로, 평양과 경성을 오가면서 벌어지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책에서 너무나 많이 묘사되었기 때문에 더욱 궁금해졌다. 다행히 책을 읽는 동안 발견한 다음의 글에서 어렴풋하게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착취하면 안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면 안 된다고 믿었다.
농부는 자기 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아프면 돈이 있건 없건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람이 평등해야 존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p.371 에필로그
"삼단논법인데 그러니까 이런 거지. 우선, 민족이 망했는데 여자가 가정에서 해방되면 무슨 소용인가. 
그다음, 민족이 자유를 찾았는데 여자가 구속돼 있으면 무슨 소용인가.
또한, 여자가 해방됐다 해도 한 줌 유산계급 여자만 자유로우면 무슨 소용인가.
결국, 민족도 구제하고 여자도 구제하고 무산계급도 구제하는 방법은 공산주의뿐이라는 거!"

p.93, 세여자 1 

소설에서는 실존인물이면서 세 여자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면서 우정과 사랑을 진하게 나눴던 세 명의 남자가 처음부터 함께 등장한다.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내가 그들을 따로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세 여자를 단지 혁명가의 아내 혹은 내조자로 묘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세죽, 고명자, 허정숙의 남편이자 우정을 나눈 동지였다. 

 

이 책은 faction(fact +fiction) 으로 읽는동안 긴 호흡도 필요하지만 굉장한 몰입도를 경험할 수 있다. 미리 얘기해서 독서의 즐거움을 빼앗을만한 내용은 철저히 배제시켰다. 따뜻한 봄이 오기 전에 읽어야 그나마 그들이 존재했던 역사의 고통과 매서운 추위를 조금이나마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꼭 추운 겨울에 읽을 것을 권한다. 

 

그들에게 인생의 봄은 상해시절이었을까?
세 여자라는 큼직한 제목 아래 20세기의 봄이 이제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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