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고미숙 선생님의 글과 강연에 빠져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선생님 책은 이 책을 비롯해 7권을 제외하고는 주로 세트로 이루어져 있는데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책 제목에 이끌려 처음 이 분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제목만으로 속 시원한 느낌을 주는 책이 얼마나 있을까?싶지만 개인적으로 전에는 그런 경험이 없어서인지 신선한 느낌의 제목이 나를 자극했었다. 예를 들면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 <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 다산과 연암 라이벌 평전 1탄>,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 어떤가? 선생님의 강연을 몇 번 들어 본 사람이라면 제목에서조차 선생님의 어투가 느껴져 웃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이번 신간도서 제목도 시원한 청량감이 있다. '그 거룩함과 통쾌함'이라니..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다시 작가로 바꿔야겠다. 선생님은 나를 모르시니 불편하실 수도..)
이번 책은 1부 글쓰기의 존재론, 이론 편과 2부 대중지성의 향연, 실전 편으로 나뉘어 있다. 프롤로그에는 작가가 어떻게 처음 글을 쓰게 되었는지와 작가의 글쓰기 편력에 대해 소개되고 1부 이론 편에는 크게 읽는다는 것의 거룩함에 대하여 그리고 쓴다는 것의 통쾌함에 대하여 심한 디테일로 상세의 상세를 거쳐 그러나 내용만은 무척 방대하게 펼쳐진다.
작가의 책은 의미의 확장이 어디로 진행될지 종잡을 수 없으니 정신줄을 꼭 부여잡고 읽어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다시 자연스럽게 원점으로 돌아오니 일관성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글쓰기 전략이다. 사실 존경스럽다. 주목할 만한 것은 2부에, <감이당>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셨을 때 글쓰기 현장에서 발표된 글을 몇 개 실으셨는데 마치 작가의 초기 작품처럼 글의 맛과 멋이 작가를 꼭 닮아 있어서 너무 신기했다. 나도 <감이당>에서 튜터들의 지도하에 정해진 스텝을 천천히 밟아가면 그런 글을 토해낼 수 있을까?
작가의 책은 정보성이 있는 자기 계발서나 소설이 아니기에 요약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의 주제 아래 시공간을 오가며 여러 방향으로 의미를 확장시키는 작가의 글을 감히 요약할 엄두도 사실 나지 않는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며 다시금 되새기고 싶어 북마크를 해 두었던 부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싶다.
연암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이런 식의 글쓰기를 그만하라는 메시지였다.
그는 말한다.
타인을 비판하는 것으로 명예를 얻는 것은 떳떳한 일이 못된다고.
그 말이 뇌리에 박히면서 비평이 딱 재미없어졌다.
게다가 아무리 독설을 신랄할게 해도 상대방이 내 의견을 경청하거나 바뀔 가능성은 거의 제로다.
왜?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를 미워하는 이의 충고를 듣는 사람이 있는가?
아니, 그 이전에 그 말을 하는 주체 역시 그걸 원하지도 않는다.
누군가의 단점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우월감을 증명해 보이는 게 목적이니까.
<동의보감>을 배우고 보니 그런 식의 글쓰기는 몸에도 해롭고 정신에는 더 해롭다.
내 삶에 해로운 데 세상을 이롭게 할 리는 더더욱 없다.
한데, 왜 그 시절엔 그게 글쓰기의 멋진 코스라고 생각했을까?
고전의 엄숙 주의와 비평의 독설, 이 두 가지밖엔 선택지가 없었던 것일까?
책 리뷰를 하다 보면 솔직해질 수밖에 없는데 가끔은 나도 모르게 자판을 두드리는 손끝에서 때 아닌 독설이 나올 때가 있다. 이미 미국에서 출판된 그것도 베스트셀러로 유명해진 책의 핵심 주제를 그대로 옮겨서 말만 살짝 바꾼 후 마치 처음부터 본인의 생각이었던 것처럼 사례를 만들어 새로운 책 한 권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책을 보고 있자면 대중을 무시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원래 출판업계가 이러한데 나만 순진한 생각에 갇혀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이러하다 보니 앙칼진 비평이 나오기 쉽다. 그러다가 내가 뭔데? 싶어서 결국 백 페이스를 누르고 만 적이 어디 한 번뿐이던가. 그런데 이런 고민이 많아질 무렵 작가의 책을 읽었으니 생각이 정리가 되는거다. '타인을 비판하는 것으로 명예를 얻는것은 떳떳한 일이 못된다' 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단점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우월감을 증명'해 보이고 싶지는 않다는 것.
인간(人間) 사이의 존재
땅에만 들러붙어 있으면 '중력의 영'(니체)에 사로잡힐 것이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면 공중 부양되고 말 것이다.
일상은 튼실하되, 시선은 고귀하게! 현실은 명료하되, 비전은 거룩하게! - 이것이 '사이에서'살아가는 인간의 길이다. (중략) 선다는 것은 하늘과 땅을 연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두 발로 서는 순간 걷기 시작한다. (중략) 그리고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온 우주가 출렁인다. 나의 몸, 나의 발만이 아니라, 내 안의 미생물과 세균들, 오장육부, 온갖 상념들, 무의식의 흐름 등등 모든 것이 함께 움직인다. (중략) 글쓰기의 원리도 그러하다. 사물을 '처음처럼' 만나고, 매 순간 차이를 발명해 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서로 연결할 수 있는 것, 이것이 글쓰기의 동력이다. 인류가 처음 천지 '사이에' 우뚝 섰던 태초의 신비로 돌아가는 길이자 갓난아기가 처음 세상과 만나는 그 순간을 일깨우는 길이기도 하다.
한자 인간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참신함 그리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은 의미의 확장 그러다 결국 글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다시 인간을 의미하는 한자로 돌아오는 테크닉, 이런 스타일이 바로 고미숙 작가만의 개성이다.
누군가에게 독서의 중요성을 침 튀기며 설명할 필요 없이 작가는 다음 두 문장으로 정리한다. '어떤 책을 읽느냐, 몇 권을 읽느냐' '다독이냐, 정독이냐'가 아니다. 책이 본디 무엇이었는지, 책과 문명, 책과 인생이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깊이 환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알게 되리라.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책과의 만남보다 더 신성한 순간은 없다는 것을.
작가와 함께 책을 읽고 세미나를 하는 그리고 학인으로 들어가 강사가 되고 저자가 되는 <감이당>의 비전은 '글로벌'이라고 한다. 여기서 '글로벌'은 글로 밥벌이를 한다는 뜻이다. 작가가 아주 어렸을 적 꿈이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유수한 작가들의 글에 겁먹어 지레 포기하고 그래도 미련이 남아 언제 가는 꼭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을 가지리라 매일 꿈꾸는 나는 감이당의 비전이 정말이지 맘에 쏙 든다. '글로벌' !
작가는 글을 쓸 때 남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한테 집중하라고 한다. 나의 생각, 나의 말, 나의 단어 등등. 이게 곧 나의 정신의 지도라고 말하며 인식이 확장되고 자유를 얻는 게 중요하지, 인정받고 안 받고는 아주 부차적인 문제라고 한다. 한동안 보이는 글쓰기를 완전히 멈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의 생각은 비공개 글쓰기가 아닌 이상, 읽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글을 쓸 수 밖에 없기때문에 내 생각이 미화되고 수식되는 그 느낌에 스스로 가식이 느껴져 더이상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유를 거쳐야 읽는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글을 온전히 쓸 수 있을까?
나는 알지만 혹시 읽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까 봐 글을 더욱 쉽고 간결하게 다듬고, 잘난 척으로 느껴질까 봐 수정하고 삭제하고, 생각하는 것 그 이상으로 예뻐 보이고 싶어서 미화시키고 꾸미고, 그러다 보면 결국 글의 뼈대와 살은 처음 나의 의도와는 멀어진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치고 그만 쓰고 싶어 진다. 그래서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남편을 제외하고는 아무에게도 내가 블로그에 글을 쓴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뭐하고 사는지 내 일상을 살짝 흘려도 굳이 내 글을 볼 수 있도록 유도하지 않은 이유다. 그러나 내가 정성스레 쓴 글을 읽고 누군가 생각지 못했던 느낌을 얻고 방향을 잡고 함께 성장할 수 있다면 굉장히 가치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다시 용기를 내 본거다.
우리는 가끔 인생 책이라 할 수 있는 양서들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미니멀리즘으로 천권 가까운 책을 정리하면서도 절대 정리하고 싶지 않고 똑같은 책을 여러 권 사서 지인들에게 선물로 나눠주는 그런 책 말이다. 작가는 그런 책과의 조우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마주친다는 게 거창한 문제의식이나 목표 설정이 필요한 게 아니고, 정말 느닷없이, 우연히, 주어진 시공간적인 조거 안에서 자기의 의식, 무의식을 포함한 어떤 내적인 힘이 한 권의 책과 마주치게 해 줍니다.
이렇게 해서 작가가 마주친 책은 바로 <열하일기>다. 7~8번은 읽은 것 같다고 말하는 작가. 난 그런 작가 때문에 처음으로 <열하일기>를 읽었다. 그리고 이어서 작가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까지 읽게 되었다. 내가 감명받은 것은 <열하일기>를 재해석하는 작가의 힘이었다. 어떻게 이런 해석을,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지? 수없이 멈춰 서서 감동받았던 기억이 있다.
특히나 그중에서 연암 박지원이 처음으로 중국 중원 땅에 들어서서 요동 벌판을 만나자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는데 그 장면을 바라보는 작가의 해석은 이렇다.
열흘을 가도 산이 나오지 않는 대평원을 만났으니 당연한 일이죠. 그 충격과 감흥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크게 한번 울어 볼 만하구나" 헐~ 이건 단순히 감탄이 아니고, 사상적으로 어떤 폭발이 일어난 거라고 봐야 합니다. 지금까지 요동 벌판을 지난 간 수천, 수만 명이 있었을 텐데 그걸 보고 "통곡하기 좋은 곳이로구나"라는 말을 한 건 연암이 처음이에요. 같이 가던 동료들이 "왜?"그랬더니 이렇게 썰을 펼칩니다.
"사람들은 다만 칠정(七情) 가운데서 오직 슬플 때만 우는 줄로 알 뿐, 칠정 모두가 울음을 자아낸다는 것은 모르지. 기쁨(喜)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노여움(怒)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슬픔(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즐거움(樂)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사랑함(愛)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미움(惡)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욕심(慾)이 사무쳐도 울게 되는 것이야.
근심으로 답답한 걸 풀어 버리는 데에는 소리보다 더 효과가 빠른 게 없지.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우레와도 같은 것일세. 지극한 정(情)이 발현되어 나오는 것이 저절로 이치에 딱 맞는다면 울음이나 웃음이나 무에 다르겠는가? (박지원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상 139쪽)
마지막으로 작가는 우리가 인문학을 왜 해야 되는지 혹은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 묻는 것은 어리석다고 표현하며 사유하지 않으면 삶을 지탱하기도, 지속하기도 어렵다고 말한다. 고전의 지혜야말로 일용할 양식이고 그 양식이 있을 때 길 위에 나설 수 있는 거라고. <열하일기> 읽기를 권하며 여행의 지혜나 비결을 터득하라고 하는데 정 안되면 '훔치거나 줍기라도'하라고 하니 작가의 표현에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다.
내가 읽는 책이 곧 '나'자신임을 아는 것이 저자가 말한 독서법이다.
오늘 나는 과연 무슨 책을 읽을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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